달이 부풀 때마다 새들이 내려와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새들이 무거운 신발을 벗어놓고 나무에 깃들면
밤새 널어놓고 간 지문을 떠왔다.
산의 어깨를 짚고 내려와 시키지 않아도
선문답 같은 낱글자들을 숲에 그려놓는 수고에 새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고르게 지문을 남기는 버릇 때문이었다.
해질녘까지 교대로 산의 정수리에 다가가 나무를 끓일
제대로 된 불을 얻어오려다가 날개를 태워먹기도 했는데,
촘촘한 자간에 그을린 깃털이 남아 있기도 했다.
물비린내가 산을 감싼 날은 새들이 먼저
수평선까지 다녀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는 순서를 기다렸다가 소금물로 얼굴을 씻고
맨 나중에 온 새소리도 씻었다.
대숲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가 행간과 여백으로 통과시켜
가지마다 더도 덜도 없이 23행 14글자로 나뭇잎들이 경작되었다.
내장을 남김없이 비워야 깊이 울리는 목어(木魚)가
산을 흔들어 깨울 때 팔만 개의 경판이 숲을 뒤덮고 있었다.
닥나무를 헹궈 놓은 한지 위에
산이 스스로 진하게 고였다고 생각할 때마다
새의 족적으로 천천히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