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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소나무와 일엽초
  • 입상자명 : 정미영
  • 입상회차 : 14회
  • 소속 : 일반부
  • 장르 : 일반부 시·수필
여우비가 그친 오후, 영취산을 오른다. 빗물로 말갛게 세수한 소나무가 푸름을 뽐낸다. 줄기에 붙은 잎사귀들이 소나무 잎과 달라 보여 가까이 다가가니 일엽초다. 일엽초는 부드럽고 수분이 많은 고목에 뿌리를 내려 싹을 낸다. 그래서 다른 식물들과 양분이나 물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직접 구하지 않은 채 의지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야속하다.
아버님은 일엽초처럼 어머님에게 의지해 살았다.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마을일에만 신경을 썼다. 물 한 그릇을 마셔도 어머님을 찾으면서, 가정은 외면한 채 동네나 친척들의 걱정거리에 앞장섰다. 그러나 어머님은 식구들을 건사하느라 힘겹게 살았다. 음식 솜씨가 좋은 탓에 시장에서 작은 반찬 가게를 했다. 새벽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과 발가락이 부르트게 애써 장사를 할 때도 아버님은 시장 번영회 회장직을 맡으며 상가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하는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소나무는 자신에게 붙어있는 일엽초는 상관없다는 듯 의연하다. 나 같으면 얌체 같은 일엽초에게 물과 영양분을 나눠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공생하는 듯하다. 겉으로 보이는 삶만이 다가 아니라, 내면을 살피는 법을 내게 일깨워 주려는지 하늘 향해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외로움을 서로 다독이며 살고 있나 보다.
가정을 돌보지 않은 무심한 아버님에게도 어머님은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을까. 아버님에게 모진 소리 한 번 내뱉지 않았다. 내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몰라도, 하루하루 살기가 버거워 무릎이 꺾일 것 같으면 단박에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찜부럭도 내지 않았다. 어쩌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아버님일지라도 곁에 머무르는 자체만으로 든든했으리라.
어머님은 동전 한 닢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알뜰살뜰 모은 돈과 대출받은 돈으로, 연탄 공장을 하게 된 것도 고단한 어머님의 삶이 밑바탕이 되었다. 남편 몫까지 일했기에 남은 여정은 깊은 강처럼 여유롭게 흘렀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의 강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큰형님이 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크고 작은 짐들을 떠안게 되었다. 당신의 자식 넷에 조카 다섯까지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시련은 속속들이 개인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연탄 공장은 도시가스의 보급에 따른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지를 못해 부도가 났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만 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소나무는 일엽초와 헤어지지 않는다. 태풍이 몰아쳐 제 몸이 뿌리 채 뽑히더라도 어쩌면 일엽초와 함께일 수 있다. 시련을 함께 이겨나가면 육체적 고통은 남아도 정신적으로 덜 힘들 텐데, 어머님은 친척 집으로 보낸 자식들이 눈에 밟혀 자꾸만 가슴이 내려앉았다. 보듬고 품어야 할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질곡의 시간은 모질게 이어졌다. 그 사이 아버님은 담낭암 진단을 받고 삼 개월 시한부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님이 병간호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고 했다. 문득 눈을 떴을 때 병실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아버님이 보였다. 링거 꽂은 팔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에 홀로 잠 못 들고 괴로워했다. 아버님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누구도 병의 고통을 대신 나누어 질 수 없었기에 지독하게 외로운 상태였다.
이제껏 어머님을 외롭게 했던 아버님이었다. 어머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어머님 곁에 머물기만 해도 가슴에 생채기가 덜할 것이다. 그런데 복수가 차오르고 음식을 못 먹는 날이 늘어갈수록 어머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무심해도 좋으니 병이 호전되기를 두 손 모아 간곡히 기도했다. 이제껏 삶의 무게가 버거워 휘청거릴 때도 있었지만,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머님에게는 힘이 되었다.
소나무와 일엽초는 사시사철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미우나 고우나 함께 있기에 비바람에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생명을 유지한다. 어머님에게 아버님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은 예전보다 더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일엽초는 귀한 약재라고 한다. 소나무에게 얹혀살면서 기대기만 하는 하찮은 존재인줄 알았는데 사람에게 이롭단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쓸모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소나무는 일엽초에게 자신의 양분과 수분, 햇살과 바람을 나눠준다. 그런 이유로 일엽초도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나눠주어 사람들의 병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리라.
소나무와 일엽초는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나에게 이야기해 준다. 아버님이 어머님에게 소홀했어도 믿음으로 서로 엮어져 있었기에, 어머님은 흔들리지 않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자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소나무와 일엽초를 쓰다듬는다. 세상과 이어진 연결 고리 하나가 내 손으로 건너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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