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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동네 뒷산
  • 입상자명 : 백지선
  • 입상회차 : 14회
  • 소속 : 청소년부
  • 장르 : 청소년부 글쓰기

살아가다 보면 힘든 날들이 있다. 신이 이 세상의 짐이라는 짐들은 모조리 내게 지우는 것 같고,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듯하다. 마음은 갈 곳 없는 바람처럼 공허하고 쓸쓸하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친구에게도, 부모님께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동네 뒷산’으로 향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다. 간단한 잔병치레는 물론이요, 크게는 폐렴으로 입원까지, 내가 앓아보지 못한 병은 이 세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정도였다. 태어나기를 허약하게 태어난 탓도 있었고, 오랜 타국 생활 탓인지 한국의 공기와 날씨에 적응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이런 내게 좋다는 보약이라는 보약은 다 지어다 먹이셨지만 차도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께서 내리신 특단의 조치는 별별 종류의 운동이었다. 수영부터 시작해서 에어로빅 재즈댄스, 발레, 리듬체조, 수영, 짐(gym) 체조 등 오만 종류의 운동을 다 해봤지만 이 또한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허약한 몸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던 12살의 어느 가을날,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말은 단 한마디였다.
“잠깐 따라 온나.”
대구 태생이신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침묵을 지키시다가 나중에 가서야 한마디를 툭 던지시는 분이셨다. 언제나 진중하셨고 결코 허둥대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으셨다. 그런 아버지의 말이 우리 집에서는 곧 ‘법’이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용히 바라만 보고 계셨던 아버지께서 드디어 한마디를 던지신 것이었다.
그렇게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물론 온몸은 중장비를 한 상태였다. 황사용 마스크를 착용하고- 초가을 바람을 들이마시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기에- 옷 안에는 얇은 런닝셔츠를 2장이나 입고- 땀이 흡수 되 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므로- 가방 안에는 젖었을 때 갈아입을 옷 2벌이 들어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아버지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곳이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무거운 등산용 가방과 촌스러운 색깔의 등산복을 입고 북적북적 모여 있던 그곳은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동네 뒷산’ 이었다. 어렸을 때 높고 뾰족한 봉우리를 가진,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서양의 산 밖에 가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동네 뒷산’이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뭔가 뭉툭하고 수더분한 느낌의, 그야말로 동네의 늙수그레한 아저씨를 연상시키는 모습의 산이었다.
“아빠, 여기 왜 온 거에요?”
“…….”
아버지께서는 또다시 시종일관 침묵이셨다. 난 잠자코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더웠다. 런닝셔츠를 2장이나 입은 마당에 산을 오른다니, 또 숨이 막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는 옛날부터 가지 않는 것이 나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오다니, 하지만 아버지의 말이 곧 ‘법’인 우리 집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숨이 컥 막혀 오기 시작했다. 천식 발작이 일어나기 직전의 단계였다. 약을 가져오지도 않았는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올라가다가는 죽겠구나 싶었다. 내 눈 앞의 아버지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아버지를 부르려는데, 아버지를 따라잡으려는데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빠, 아빠! 같이 가요!”
“……천천히 온나. 길 이자뿌리지 말고 똑바로만 와라. 그람 된다. 어여 오그래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이 사람 많은 곳에 나 혼자 두고 가겠다니? 하지만 뭐라고 반박도 하기 전에 이미 아버지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문뜩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똑바로만 움직였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그 북적대던 사람들이 점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울창한 숲을 이루는 키다리 나무들의 수는 많아져만 갔다. 나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주위를 둘러보면 작은 새들을 볼 수 있었다. 정답게 노는 두 마리의 새, 짹짹 지저귀는 한 무리의 새, 그들 모두 나를 보며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으면 졸졸 마치 아기 오줌소리처럼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나의 가슴에는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두근거림이 기분 좋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림은 내 가슴을 채우고, 내 온몸을 채우고, 그리고 내가 있던 그 길 전체를 채웠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나와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새의 지저귀는 소리의 멜로디가 하나하나가 내게 있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나무의 잎사귀하나, 나뭇가지 하나, 흐르는 시냇물의 그 방울 하나하나가 내게는 다 소중해졌다. 더 이상 산은 내가 이질감을 느끼는 곳이 아니었다. 산은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 또한 이미 그 산에 속한 것 것이 되어 있었다.조금 더 올라가보니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약수터에 앉아 숨을 고르고 계셨다.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시며 내게 약수터 물 한 바가지를 건네셨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리고 충분히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 산이 우리에게 주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내려오는 길에 아버지께서 이 산과 얽힌 이야기를 말씀해주셨다. 당신은 젊었던 그 시절, 힘들 때마다 집 근처 이 산에 올랐다고 하셨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두려워져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을 때마다 이 산의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다. 그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콧잔등이 시큰해진 건 왜였을까.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이제 몸도- 아버지의 특별 ‘등산’처방 덕분인지- 건강해졌고, 런닝셔츠를 2장 입지 않아도 될 정도로 컸다. 그래도 여전한 것은 뒷산을 향한 나의 애정이다. 삶에 힘든 순간이 있다. 신이 내게 이 세상의 짐이라는 짐들은 모조리 지우는 것 같고,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은 그런 순간, 그럴 때마다 나는 동네 뒷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오르던 그 뒷산이 불러일으키는 향수(鄕愁)를 만끽한다. 마치 그 때처럼 산과 내가 하나가 된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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